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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프랑스 혁명 2편

by Todayinfonews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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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전쟁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 전쟁 (1792년 ~ 1802년)
프랑스 혁명 사상의 전파를 염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하여 혁명정부를 압박하였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각 계파간에 전쟁에 대한 계산은 달랐지만 모두 전쟁을 원했다.

푀양파는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코뱅을 제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지롱드파는 전쟁을 유럽의 인민들을 해방시키 성전이라 생각했다. 루이 16세와 측근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에 군주권이 부활할 수 있는 은밀한 희망에서 전쟁을 원했다.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에 동의했다. 1792년 4월 20일, 루이 16세의 제의에 따라서 의회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안을 열광적으로 통과시켰다. 프로이센에는 조금 늦은 7월 8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장교들은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대한 협력에는 소극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9,000명의 장교들중 약 6,000명이 망명하였고 병사들은 정치 클럽에 참석하는등 군기가 나태해졌다. 충원된 의용병들은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5월에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오스트리아와 첫 전투중 자신들의 지휘관인 딜론 장군을 살해하는 하극상을 벌이는등 사실상 프랑스 정규군은 와해수준에 놓였다.

왕궁 습격 사건

상퀼로트
다급해진 입법의회는 선서거부파 성직자의 추방, 국왕의 친위대 해산, 지방출신을 포함한 연맹군(국민방위대) 창설등의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6월 12일 루이 16세는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롱드파의 대신들을 해임했다. 시민들은 루이 16세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반발했으며 아울러 패전의 원인이 국왕 일가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결국 파리 시민들이 6월 20일, 왕궁인 튀틀리 궁을 습격하였다. 비록 습격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심한 모욕을 당했다. 왕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상퀼로트의 출현과 지방에 있던 혁명을 옹호하는 국민방위대가 파리로 집결하면서 혁명이 급진적으로 흐르게 되었고 공공 질서가 무너지며 발생했다.

상퀼로트
패전과 식량부족, 인플레 때문에 파리의 민심을 극도로 흉흉해졌다. 공채 아시냐는 가치가 40% 폭락했고 물가는 폭등하여 농민들은 곡식판매를 거부했다. 소요가 발생했고 도시민들은 당국에게 공정 가격제의 시행을 요구했다. 이런 혼란속에서 도시에서는 상퀼로트가 등장했다. 이들은 귀족 남성들이 입는 퀼로트(무릎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대신에 긴바지를 입고 다녔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 졌으며 또 다른 특징은 붉은 모자와 긴 창을 들고 다녔다. 이들은 도발적인 활동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고 간 상퀼로트들은 대부분이 소생산자, 소상점주,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초기에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무산계급이 다수였으며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되었던 계층이다. 이들은 자본집중 반대, 직접 민주주의를 통한 민중의 정치참여, 자유보다는 평등, 국왕 경멸, 국왕의 거부권 폐지, 공화제등을 요구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로 인해 상퀼로트는 대혁명 시기의 급진적인 민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8월 10일 사건

튀일리궁 습격, 카루젤 광장에서의 전투
7월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는 국왕 루이 16세가 행사한 거부권을 무시한채 조직된 의용군들이 파리로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 7월 25일 프로이센군의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리 시민들이 또 다시 부르봉 왕실을 모욕한다면 파리를 무자비하게 응징하겠다는 협박성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역효과를 불렀는데, 파리 시민들은 왕실이 여전히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패전으로 인한 절망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였고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시위가 벌어졌는데, 소요사태가 커지더니 극단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국가적 위기속에 혁명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면서 입법의회는 이미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상퀼로트, 자코뱅파, 코르들리에파, 지방에서 온 의용군 등이 파리를 장악하여 상황을 주도해 나갔다.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8월 10일에 왕궁인 튀틀리궁으로 몰려가서 공격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루이 16세는 의회로 피신하였다. 의회도 침입을 받아 군중의 압박속에 황급히 왕권을 중지시키고, 국왕 일가를 모두 탕플 탑에 유폐했다. 또한 당통이 이끄는 6인 임시내각을 만들고 빠른 시일내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국민공회 구성을 약속했다. 이 사건은 군주제가 몰락하고 공화제가 시작되는 계기되었다.

9월 학살

파리는 상퀼로트들이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고 혁명은 급진화하여 민중혁명 단계에 들어갔다. 상퀼로트들에 의한 자치체가 형성되어 이들의 압력으로 왕당파 신문들이 폐간되고, 징발, 징집, 공정가격제가 실시되었다. 감시위원회, 비상 인민재판소가 설치되고 선서거부파 성직자들의 추방, 종교의식 금지, 이혼 허용등의 법령들이 통과 되었다. 이런 가운데 프로이센군이 8월 19일 국경을 돌파하여 9월 3일 베르됭이 점령 당했다. 프로이센군은 곧 파리로 들이닥칠 기세였다. 패전 소식에 파리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지자 자원 입대자가 증가하였다.

한편, 의용군의 출병 후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전선에 나가기 전에 반역자들에 대한 숙청이 결정되었다. 9월초부터 모든 감옥을 돌아다니며 반혁명자로 의심되는 수감자들을 형식적인 즉결심판을 거쳐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또한 프랑스 전역의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하였고, 특별형사재판소의 약식 재판만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 자행되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은 대략 최대 1만 2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발미 전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베르됭을 점령한후 파리를 목표로 아르곤느 계곡을 따라 이동하다가 뒤무리에와 켈레르만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과 1792년 9월 20일 발미(Valmy)에서 조우하였다. 의용군을 포함한 4만 7천명의 사기 높은 프랑스 군과 프로이센군 3만 5천명이 8시간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 포병대가 집중 포격을 쏟아부운후 켈레르만의 보병부대가 프로이센 군을 상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국경을 넘어 퇴각하였다. 발미 승리후 프랑스 군은 국경을 넘어 사부아, 니스, 륀 등을 침공하였다. 1792년 11월에는 뒤무리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제마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후 벨기에를 점령하여 강제 병합하였다.

발미 전투에 의용병으로 참가한 많은 하층민 계급( 상퀼로트, 무산자 계급)은 승리로 인해 정치적 발언권이 더욱 커졌다. 상퀼로트는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한 자코뱅파를 옹호했고, 혁명은 극좌화되어 갔다. 자코뱅파에는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의 혁명전쟁의 시작과 함께 발행한 아시냐 지폐(교회의 토지 등을 담보로 한 불환지폐)의 증발(액면가의 57%로 급락)은 나중에 1794년 최고가격령 폐지와 함께 발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

공화국의 설립


국경지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9월 학살' 과 상퀼로트의 다소 과격한 활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기권율이 높았다. 시민들이 겁을 먹고 감히 투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49명의 새 의원들이 뽑혔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발미전투의 승리는 시기적절하게도 공화정의 출발에 큰힘이 되었다. 국민공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수행했다. 파리를 장악하고 코뮌을 통제하고 있던 상퀼로트의 압력과도 끓임없이 타협해야 했다. 초기에 국민공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160석을 차지한 지롱드파였다. 이들은 공정가격제를 거부하고 경제 자유주의를 선호했다. 도시의 부유한 부르조아 출신인 지롱드파는 비상 재판소를 폐지하였고 공화정의 출발로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로 전락한 국왕 루이 16세(시민 루이)의 목숨을 구하려 노력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선호했다.

루이 16세 처형


급진화된 혁명세력이 장악한 국민공회는 혁명의 후퇴를 막고 혁명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이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왕의 시신은 즉시 마들레느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왕의 무덤이 알려질 경우에 왕당파의 순례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불동맹 전쟁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 · 스페인 · 사르데냐 등을 포함한 11개국이 프랑스 혁명정부를 적대시하며 대불동맹을 결성하였다. 유럽의 군주들은 국왕이 없어도 국가통치가 가능하다는 불온한 혁명사상이 자국민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했다. 금번 제1차 대불동맹은 피트수상이 이끄는 영국이 앞장섰다. 이는 프랑스가 지난 92년 11월에 벨기에를 침공 후 합병하여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를 점령한 것이 영국의 대륙무역에 위협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군주들에 의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프랑스 혁명정부는 93년 2월 1일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제1차 대불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불동맹의 군대들도 신속히 움직여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국경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연패하자 다급해진 혁명 정부는 “30만명 모병”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왕당파가 1793년 3월 방데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다.

공포 정치

 

이러한 위기 외에도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6월 2일,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7월 13일 자코뱅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하는등 테러리즘도 연발하여 프랑스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실시하여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 등 에베르 파와 당통 파를 숙청했고, 1793년 7월,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 분배 등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다.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자코뱅 파는 8월 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왕당파의 반란과 대불동맹군에 대해 반격에 나섰다.

아시냐의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농민과 상인들은 수확과 상품에 대해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가택수색과 징발이 빈발했고 밀고자들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했으며 혐의만으로 체포가 가능했다. 1794년 6월에 제정된 일명 《프레리알 22일 법》으로 인해 법률조력과 증인심문이 폐지되고 선고는 무죄와 사형, 이 두가지 판결로 축소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를레앙 공작, 뒤바리 부인, 지롱드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수많은 반대파와 반혁명 혐의자들이 약식재판만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되었다. 공포정치로 인해 1년여 동안 파리에서만 30만명이 체포되고 약 15,000명이 처형당했다.

이처럼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에서는 1793년 8월 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파는 1794년 2월 4일 국민 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 서구 세계 최초의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 이렇게 루이지애나, 기아나,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등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흑인법》 아래 농장 농업에 묶여 있던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산토 도밍고의 흑인 실력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프랑스 복귀를 이끌어내는 등 자코뱅 파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르미도르 반동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켜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부르주아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1794년 7월 27일(혁명력 2년) 측근인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 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 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한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 《조제프 푸셰》에서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에는 "혁명은 모든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고 모든 책임을 묵묵히 떠맡았던" 반면 반동 이후에는 "혁명은 부당한 일을 한 적도 있다는 것을 소심하게 인정하고 지도자들은 혁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총재 정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다.

1795년 10월 5일 반대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반면, 총재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통령 정부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1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최초의 제정으로 인해 10여년만에 단명하며 막을 내렸다. 또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혁명정신


1789년 혁명 초기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와 평등, 박애였고,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발간된 여러 기록물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유와 평등, 권리로 표현된 경우도 있고,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에 부수되는 당면 문제들이 거론되어 있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널리 확산된 혁명 정신의 여파로 다양한 계층에서 분출된 수많은 요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 수시로 반영되었고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이 거론되었다.),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는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혁명의 목표들은 다양하게 나타나있다. 혁명 정신과 관련하여“박애”를 올바르게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 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평가 및 영향


프랑스 혁명은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은 환영을 했고, 영국의 워즈워스, 콜리지 시인등은 매우 열렬히 환영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실망하기 시작했다. 공포정치가 프랑스에 출현하였고, 나폴레옹의 독재가 가능케 했다. 콜리지와 워즈워드 시인도 환멸을 느꼈고 본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영국의 감리교 창시자이자 잉글랜드 성공회 신부인 존 웨슬리 신부는 처음부터 이 혁명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 혁명은 말세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도 두렵게 지켜보았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다수가 이 혁명에 대한 반감이 크게 일어났다.

결과론적인 평가는 프랑스의 왕조를 부르봉 왕가에서 보나파르트 왕가로 바꿨을 뿐, 그 이외의 의미는 없는 혁명이었다. 따라서, 이 혁명의 유일한 수혜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단 한 명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귀족들은 혁명을 감지하고 해외로 자산을 빼돌린 사람들도 있었고 많은 귀족이 부르봉 왕조를 복귀시킨 후 혁명 시기의 몰수에 대한 배상을 받고 해외로 또 재산을 빼돌렸기 때문에 인명손실을 제외한 자산손실은 의외로 적었다. 혁명 1세대 최후의 강자였던 조제프 푸셰 역시 귀족들의 귀환에 대한 여파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는 결국 맞서는 대신 도주를 선택하였고 그 대가로써 마지막까지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국가나 왕에 대한 충성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는 이후 라이벌인 영국과 독일에 비해 약세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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