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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정화의 원정

by Todayinfonews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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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하서양(下西洋)은 1405년과 1433년 사이에 걸쳐 일어난 7번의 탐험 원정이다. 영락제가 1403년에 함대의 건설을 명했고, 이 함대는 환관 정화의 지휘를 받아 남중국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의 해안까지 다녀오는 성과를 올렸다. 7번의 원정들 중 6번은 영락제의 재위 시기에 행해졌고, 나머지 1번은 선덕제의 재위 시기에 일어났다. 첫번째 원정부터 세번째 원정까지는 인도의 캘리컷까지 항해한 후 돌아왔고, 네 번째 원정은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까지 갔다. 이후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 동부까지 항해한 이후 명나라로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원정에 사용된 함선들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고, 엄청난 양의 보물들을 싣고 있었다. 이 보물들은 중국의 부와 권력을 타 지방에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그들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를 원하는 지역 지도자들의 대사들을 귀환할 때 함께 데리고 갔다. 이 원정 동안 그들은 팔렘방 지역의 해적 함대를 소탕했고, 명-코테 전쟁에서 스리랑카의 알라케쉬바라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웠으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의 군사 세력들을 진압하였다. 이 때 일어난 명나라의 군사 원정으로 인하여 많은 나라들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으며, 명나라는 더욱 강력한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을 세계 곳곳에 미칠 수 있었다. 또한 해적 소탕과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명나라 함대는 해상을 평화로이 만드는 데 일조하였기에, 주변 나라들의 교류가 더욱 원활해졌으며 명나라의 위상은 덩달아 높아졌다.

정화의 원정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의 지지는 황제의 총애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강했다. 게다가 과거 시험을 통해 올라온 명나라의 전문 관료들은 이 귀족들에 대단히 배타적이었고, 대규모 원정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후 선덕제가 즉위하고 관료들이 핵심 권력을 잡자, 귀족들은 황제의 신임을 잃었고 더이상 대규모 원정을 주장할 정도의 세력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후 원정이 중단되자 경제의 중앙집권화는 더욱 강해졌는데, 원정으로 인하여 대규모 흑자를 보던 지역의 호족들과 관리들이 더이상 이에서 이익을 창출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이를 깨달았고, 황권 강화를 위해 더더욱 원정대 파견을 실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이 원정은 15세기에 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당시 동쪽과 남쪽 해안을 지킬 정도의 상당한 해군력이 있었으며,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했다. 다만 현재도 이 원정의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배의 크기, 원정대의 항로, 방문한 나라와 항구들에도 이견이 조금씩 있다.

 

아래 나오는 정화 원정단의 행적은 날짜만 비교적 정확하고, 구체적인 행적은 학자들이 참가자들의 회고록이나 그밖의 사료로 추정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원정단의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예를 들어 실론에 세운 비에 적혀진 날짜를 두고 , 이것이 비가 실론에 세워진 날인지(그러므로 2차원정중 세워짐), 혹은 비를 남경에서 제작한 날 (이렇게 되면 3차원정 당시 세운게 된다)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설이 모두 다르다.

 

정화의 대원정은 수천년 중국 역사 전체를 돌이켜봐도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든 유쾌한 일탈과도 같았다.

명나라 멸망 이후 들어선 청나라 역시 마카오를 창구삼아 서양과 일정한 통상무역은 하였지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청나라 시절 조정에서 일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어지간한 식자층 중국인들보다 중국과 유럽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 더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도,[12] 정화의 원정에 의해 습득된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국 지식층들에게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정화의 대원정은 중국의 사실상 첫 해양진출이자 마지막 원정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있으나, 대원정이 없었더라도 중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대서양 같은 어마어마한 대양을 건너는 것도 아닌 철저한 연안항해라는 점에서, 정화 이전 이미 알려진 동아프리카가 그 최대진출영역이었기 때문에, 중국사를 뒤바꾸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설령 아래 정화가 희망봉을 돌아서 유럽이나 아메리카까지 도달했다고 쳐도, 위에서 말한 중국의 사정 때문에 중국인들은 서양인들과는 달리 해외진출이나 식민지 건설에 더 열의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결론은 함대의 규모나 원정거리가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변혁 시켰는가? 이 부분이 중요한건데, 정화의 함대는 명나라에 새로운 기술이나 재료, 혹은 사상을 도입하여 큰 변혁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차 원정 (1405.6.15-1407.9.2)
난징에서 출발하여 장강을 따라 동중국해로 나가 남서쪽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 참파,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에 닿았다. 여기는 화교 중국인 해적 진조의가 현지인 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지배자 노릇을 하던 곳이었다. 여기서 일단 기항해서 중간 기지로 삼았고, 이후 더 서진했으나, 말라카 해협을 지날 때, 진조의의 해적단과 교전해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진조의를 생포했다. 진조의를 압송하기 위해 서진을 중단하고 다시 뱃길을 돌려 난징으로 돌아왔다. 일설에 의하면 인도양까지 진출한 후 돌아오는 길에 잡았다고 한다.
영락제는 정화의 원정에서 나온 성과에 흡족해마지 않았고 명나라에 와서 무역과 향락을 즐기던 외국인들에게도 대체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광둥성 출신의 한족으로서 오래 전부터 해금령을 어기고 노략질을 일삼았던 해적 진조의에 대해서는 나라의 체면을 지키겠다는 취지로 처형을 결정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도양의 다른 나라들이 명나라 원정함대에 대한 신뢰를 보내게 되었고, 이후 정화는 여러 나라들간의 크고 작은 분쟁에서 중재를 맡게 되었다. 정화는 이렇게 원정을 다니면서 귀국길에 여러 나라의 사절단을 데려가기도 했는데, 이들은 황제에게 큰 환대를 받았으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겐 여러 논란의 불씨로 여겨지기도 했다.


2차 원정 (1407.9.13 - 1409 여름)
1차원정에 돌아오자마자 영락제는 2차원정을 명령했고, 10일후 다시 출발했다. 팔렘방에서 더 서쪽인 태국, 자바, 실론을 거쳐 인도 서해안인 캘리컷에 도달했다. 실론(스리랑카)에서 한문, 타밀어(현지어), 페르시아어 (서역 공용어)의 3개국어로 된 비석을 남기는데, 이 비석은 한동안 잊혀졌다가 1911년 재발견되어서 정화의 원정이 여기 닿았음을 증명했다.


3차 원정 (1409년 10월 - 1411년 7월)
역시 난징을 출발해, 갔던 길로 가서 실론의 감폴라 왕국을 정벌했다. 이들은 2차 원정 때 실론 섬에 상륙한 명나라의 선발대를 몰살하고 노략질을 벌이는 등 적대적 태도를 보였으나 병력이 미진하여 그냥 두고 귀환했다. 하지만 이번 정벌에서는 알라케스와라(Vira Alakesvara) 왕을 사로잡아 데려왔다. 이 때 감폴라 왕국은 일부러 정화의 상륙을 허용하며 콜롬보에 정박하던 정화의 본대로부터 정화를 떼어놓으려 했으나, 정화와 그 부하들이 왕궁을 급습하여 왕과 왕족과 신하들을 모두 잡아버리는 바람에 전열을 정비해보지도 못하고 명군에게 제압당했다.
정화는 3차 원정에서 귀국하며 알라케스와라 왕을 영락제에게 바쳤으나, 영락제는 관대하게도 사면하여 평민으로 만들고 왕위를 난징에 온 실론의 대사로부터 추천받은 옛 왕족의 후예인 파라크라마바후 6세에게 넘기며 알라케스와라도 실론으로 돌려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실론에서는 파라크마라바후 6세가 1412년에 코테(Kotte)에서 새 왕국을 개창하여 코테 왕국(1412년 ~ 1597년)이 들어서게 되었다. 캘리컷에서 더 서진하여 페르시아만을 거쳐 홍해상의 아덴에 도착했다. 여기서 뱃머리를 돌려 귀환했고, 귀환 중에서 조공국 수마트라왕의 요청을 받아 반란 세력을 토벌해 주었다.


4차 원정 (1413년 11월-1415년 8월)
케냐까지 도달했고, 케냐의 말린디 특사가[6] "기린"을 조공했다. 원래 이것은 giraffe로 상상종인 기린과는 다른 동물이지만, 특사가 이것을 게린(Gerin)[7]으로 발음하자, 중국인들은 발음과 모양의 유사성에 이를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으로 여겼고, 영락제는 매우 기뻐하여 특사에 큰 상을 내리고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청나라 때 원본을 보고 그린 모사작이다. 이후 중국인들은 이 동물이 신화속의 동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현재는 장경록(长颈鹿, 목이 긴 사슴)으로 부른다. 이 4차항해 이후로 중국인의 무역활동은 그동안의 인도보다도 훨씬 서쪽인 호르무즈까지 확장되었다.

5차 원정 (1417년 6월 - 1419년 8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 닿았다. 중간에 갈라진 분함대는 1420년 여름에 귀국했다. 귀환할 때 얼룩말, 코뿔소 같은 아프리카의 귀한 동물을 실어 왔다.


6차 원정 (1421년 1월 - 1422년 8월)
이 원정은 1~5차 원정으로 데려왔던 조공사절을 돌려보내기 위한 원정이었다. 그리하여 항해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본대에서 갈라진 분함대들이 아프리카, 인도와 아라비아의 여러곳으로 퍼져나가 30여개국에 달하는 사절들을 고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항해중단기 (1422-1430)
그러나 6차 원정 이후 여러 사건 때문에 항해가 중단된다.[8] 1424년 명나라 함대의 보급기지 노릇을 하던 팔렘방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한 왕자측이 명나라의 개입을 요청하여 이를 중재하기 위해 정화의 함대는 다시 떠났다. 정화는 도착하여 팔렘방 왕을 책봉하고 난징에 귀환했으나, 돌아오자 영락제가 이미 한달 전에 붕어한(1424.7) 것을 알았고,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천도 및 재정상의 이유로 이후의 원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홍희제는 베이징을 영 싫어했기 때문에 다시 난징으로 재천도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정화를 수비태감에 임명해 천도의 사전 정지 작업을 맡겼다. 여기에서 대를 이은 황제들의 정화에 대한 신임도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화는 1425년 난징의 재건임무를 맡아 여러 천도작업에 종사했고, 특히 난징의 불교사찰인 대보은사 재건을 떠맡게 되었다. 그가 이슬람 신자긴 했지만, 여러 종교에 관용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화는 항해 공백기에도 황제의 신임을 받아 중책을 맡고 있었다. 홍희제는 다시 난징으로 오지도 못하고 1425년 붕어했고, 대보은사는 1431년에야 공사가 끝났다.[9] 이 절은 난징의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컸으나, 청나라 시절 태평천국의 난때 파괴되었다.
7차 원정 (1431년 1월 - 1433년 7월)
홍희제가 일찍 사망하고 즉위한 선덕제는 항해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정화 자신은 나이가 많다며 임무를 사양했으나 결국 정화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고 7차 항해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이 때 정화는 메카에 도달해 참배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랫동안 고생한게 탈이 났는지 1433년 4월,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중 사망했다.[10]
시신은 원정대의 관례에 따라 예를 갖추어 인도양에 수장되었으나,[11] 본국에 가묘가 만들어졌다. 원정대는 정화의 부관이던 환관 왕경홍이 지휘하여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다시 항해의 재개가 논의 되었으나 정화를 대신할 인물이 없었고 이런 해외진출에는 반대가 많아서 선덕제 역시 그 김에 외정을 삼가고 내정에 치중하면서 항해 사업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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