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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운요호 사건

by Todayinfonews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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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5년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 '운요(雲揚, 한국 한자음으로 운양)'가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 등의 공격을 행한 사건.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졌다.

2.사건배경
봉건적 막부 체제가 막을 내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일본은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본래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부터 조선을 재침공하여 혼쭐을 내주고 조선으로부터 조공을 받자는 정한론의 싹이 자라고 있었고, 서구식 근대화가 됨에 따라 서구 열강을 따라 제국주의적 추세도 고개를 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구시대적 사농공상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잃게된 사무라이들은 전쟁이 일어나서 자신이 활약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 소득을 얻고, 필요하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는 여론이 강해졌다.

1853년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문호 개방을 선포했던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함께 조선에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운운하며 상호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반서양 정서로 인하여 실패만 거듭했다. 흥선대원군은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청(清) 이외에 서양권 국가들과의 교류 및 개방을 엄격히 금지했고, 또한 서양에 문호개방을 한 일본에게도 적개심과 불편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1870년 메이지 정부의 서계(국서)를 받아본 조선 정부는 일본이 천황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제의 용어를 쓴 것과 예전에 조선이 준 도서(圖署)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에 심히 불쾌해하며 서계의 접수 자체를 반환·거부해버렸다. 이후 조일 외교 관계에 골이 점점 깊어졌으며, 일본 내부에는 정한론이 더 득세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1873년 일본에서는 정한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메이지 6년 정변 사건으로 정한론 강경파가 실각하였다. 정한파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온건파는 대신에 1875년 대만으로 소규모 원정 을 보내서 정한론의 동력을 잠재우기도 하였다. 대만 출정 자체는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한계와 말라리아에 의한 비전투손실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약간의 돈을 뜯어내는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한편 일본의 메이지 6년 정변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했고,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쇄국정책을 강하게 펼친 흥선대원군 시대와 달리 다시 조선과의 외교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득 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1875년 8월 청나라로부터 "일본이 대만 원정에 준비했던 5천명 가량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할 수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조선이 미리 미국과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내용의 비밀 문서를 받았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결국 일본과 교섭을 하기로 결정한다.

1875년 2월 조선은 일본의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가 가져온 새로운 서계를 받아보았다. 조선의 요구대로 서계에서 천황과 같은 단어는 빠진 대신에 '대일본'과 같은 용어가 사용되어 조선 조정의 분노를 일으켰으나, 개항에 대한 고종의 의지가 강하여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이 일본과의 통상 협정을 극렬히 반대했으며, 동래 부사는 일본 사신이 대례복(메이지 정부의 공식 관복으로 서양식 의복)을 입고 성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교섭에 난항을 겪자 모리야마는 일본 정부에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군함 파견을 요청하였고, 일본 내부의 강경파는 외무경 이와쿠라 도모미,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 등의 동의를 얻어 1875년 5월 운요호를 포함한 2척의 군선(軍船)을 부산으로 파견한다. 부산에서의 도발과 무력 시위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같은해 9월 운요호는 단독으로 강화도에 무단 침입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고 한다.

1875년 5월 25일과 6월 13일에 일본 해군의 운요호와 다이니테이보호가 각각 부산에 도착했다. 운요호가 부산항에 오자 당시 '부산 훈도'였던 현석운이 부산 주재(駐在) 왜관(倭館)을 항의 방문하여 군선 침투 사유를 물었고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 소좌는 '일본과 조선 간의 상호 통상을 위해 방문하였으며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러 왔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 두 척의 함선은 부산 앞에서 포격 연습을 하며 무력 시위를 하였고,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을 측량하고 영흥만과 영일만 일대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조선이 무력 시위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조선이 도발에 넘어가서 먼저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한데, 조선은 일본의 의도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고종으로부터 일본과 다툼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명을 받고 있었던 부산의 관리들은 먼저 일본 함선을 공격할 의사가 없었고, 조선 조정은 무력 시위 이후에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이후에도 협박이 있을 때마다 양보해야 한다며 일본에 무대응으로 일관하여 교섭을 결렬시켰다.

사실 일본의 판단과는 다르게 남의 나라에서 허락없이 무단으로 측량을 하는 것은 서양의 국제법에서도 불법이기 때문에, 만약 이 때 조선이 공격을 했어도 나중에 조선이 외교적으로 불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강화도에서 2차 도발을 할 때는 수법을 바꾸어 식수를 얻으러 왔다고 둘러댔는데, 이 식수 부분 조차도 후술된 것처럼 일본의 주작으로 판명되었다.

부산에서의 1차 무력 시위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해군성에 조선 침략을 건의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운요호를 일본 열도의 최북단에 있는 홋카이도로 배치하려고 하였다. 홋카이도로 가는 도중 해군에 탄원을 한 이노우에는 결국 해군대보 가와무라 스미요시로부터 운요호의 목적지를 청나라의 잉커우로 변경한다는 허락을 얻어낸다.

9월 20일 운요호는 잉커우로 가는 길에 굳이 현재의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도달했다. 이노우에를 포함한 일부 승조원들이 단정을 타고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는데, 때마침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 수군이 일본군 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단정을 향해 돌아가라고 명령과 함께 경고 포격을 가하였고 단정은 이에 맞서 소총으로 응사한 후 운요호로 돌아갔다.

운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전말을 알기 어려우나, 일본의 역사가들은 마치 노구교 사건에서의 무타구치 렌야처럼 해군 내부의 일부 강경파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본다. 반면에 한국의 학자들 중에는 행간의 맥락을 추정하여 메이지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다음 날인 9월 21일, 운요호 모함(母艦)은 강화도에 접근하여 함포를 발사하며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였고 초지진은 파괴되었다. 허나 운요호는 승조원이 불과 수십명 단위의 작은 배라서 이들만으로 강화도를 점령하기는 어려웠고, 방어가 비교적 허술한 영종도를 노려 공격했다. 승조원들 및 해병대원들을 차출해 편성된 일본의 해군 육전대가 지금의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기습 상륙하여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인 끝에 근대식 대포와 무기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영종도를 습격하여 성(城)을 점령, 조선군의 대포 35문과 기타 무기를 노획하고 성내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 40명, 포로 15명이었다. 일본 해군은 단지 3명의 부상자만 냈을 뿐인데, 그마저도 교전으로 인한 부상이 아니라 해병 3명이 상륙 중 조수간만이 큰 뻘을 통해 가다가 발을 삔 것이었다. 9월 23일 운요호는 일본으로의 귀국길에 올랐다.

9월 27일 나가사키로 귀항한 뒤 함장 이노우에 소좌는 사건의 경위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10월 8일 해군성은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공개 발표하였다. 이노우에의 보고서에 따르면 급수를 목적으로 우발적으로 강화도에 정박했고, 운요호는 교전 당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으며, 모든 전투는 9월 20일 하루 동안 발생했다.

하지만 이노우에의 보고서는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고, 최근에는 이노우에가 나가사키에 귀항한 다음 날인 9월 30일에 작성한 최초의 보고서가 발견되면서 아예 조작으로 판명되었다. 2002년에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실에서 발견된 이 최초 보고서에 따르면 운요호는 의도적으로 강화도에 접근하였고, 물이 아닌 해안 측량과 조선 관리와의 면담이 강화도 접근의 목적이었으며, 일본 국기를 계양하지도 않고 강화도 해안에 접근하여 동정을 살피다가 조선군의 포격을 받았고, 모든 전투는 하루가 아닌 3일 동안 벌어졌다.

이노우에가 이렇게 보고서를 날조한 이유는 뒤늦게 운요호의 행동이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 주도의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을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했기에, 운요호의 군사 행위가 국제법상 용납할 수 없는 도발 행위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국제법상 운요호가 한 것처럼 무단으로 타국의 해안에서 측량을 하는 것이 불법이지만, 식수가 떨어졌을 때는 임의로 아무 항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강화도 접근 목적을 바꾸었다. 또한 군함이 타국 영해에서 3일이나 있는 것은 일본이 먼저 전쟁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3일을 하루로 줄여야 했다. 한국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9월 29일에서 10월 8일 사이에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먼저 읽어보고 조작에 대한 자문을 한 것은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와 이토 히로부미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온건파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운요호 사건의 전말이 "조선이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던 운요호를 의도적으로 먼저 공격했다"라고 왜곡되어 전해지면서 일본 내에 강경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본래 정한론에 반대하던 온건파들도 "당장은 조선 침략에 성공하기 어려우니 국력을 더 신장시킨 다음에 조선을 치자"라며 조선 출병 자체는 긍정하고 있었기에, 일본 정부는 일단 조선과 청에 외교 사절을 보내서 문제를 따져보고 외교적 해결에 실패할 경우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은 부산에 3척의 군함을 보내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이어서 1876년 2월에는 강화도로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함선을 보내 조선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묻게 하였다.

일본의 막무가내식 행동에 당황한 조선 정부가 청나라의 도움을 원했으나, 당시 제 코가 석자였던 청나라는 조선에게 일본과 외교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해결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 외교 대표와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개항시켰다.(강화도 조약) 그것도 자신들이 쿠로후네 사건 때 당했던 방식 그대로 차용해서 거의 똑같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끔 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조선의 멸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조선 멸망사를 배울 때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로 꼽힌다.

본래 국제 조약은 상호간에 이익이 되도록 체결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강화도 조약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약 자체가 일본에게 조선 연해의 측량권, 무관세, 일본인의 불체포 특권 등을 주어 조선의 자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요호 사건에서 강화도 조약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본 내부의 문제도 일정부분 해결해 주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잃고 잉여 인간이 되어버린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반란이 우후죽순처럼 터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내부의 불만을 해외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킴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을 위한 배후 시장을 어느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혹자는 당시 일본에게 있어서 아시아 국가와의 평등 관계 수립은 국운이 걸린 외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보다 약한 나라를 짓누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국운이 걸린 문제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외교의 최고 과제는 막부 시절에 성립된 서양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고 어차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쪽과 남쪽에 광활한 바다를 접한 일본의 지정학적 상황에서는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 수 있는 국가가 조선, 청나라, 아니면 멀리 남쪽의 필리핀 정도 밖에 없었는데, 청나라와 필리핀은 이미 서양 열강이 꿀꺽했거나 침을 발라놓은 상황이었기에 조선 밖에 남은 국가가 없었기는 했다. 당시 조선은 적극적인 쇄국으로 인해 서양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미처 서구 열강의 손길이 조선까지 닿기 전에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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