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탈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탈퇴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다른 어떤 연방 주보다 무효화와 탈퇴에 적극적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860년 12월 《연방 탈퇴의 원인과 정당성에 대한 즉각적인 원인의 선언》을 채택했다. 그것에는 ‘남부에서의 노예주에 대한 권리’를 담고 있었지만, 도망노예법을 지정한 북부의 권리에 대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북부의 주가 헌법 하의 연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남부 주의 권리에 대한 모든 침해는 노예제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탈퇴 무렵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일곱 개의 주들은 북부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그 일곱 주들은 1861년 2월 4일에 남부 정부인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을 설립하였다. 1861년 3월 4일부로 재임 기간이 끝남으로써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제임스 뷰캐넌이 작게 반발했음에도, 일곱 개의 주들은 자신의 주 경계 내의 연방 정부 요새와 그 외 모든 재산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뷰캐넌이 말하길, 드레드 스콧의 결정은 남부가 분리 독립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의 증거이고, 북부 연방이 “영속적이 되도록 의도”되었지만 “무력으로 주가 북부 연방에 남도록 하는 것은 의회에 허락된 권력이 아니라고 하였다.” 텍사스에 있는 전체 주둔지에 있는 미군의 1/4은 사령관 데이빗 E. 트윅스의 주 세력에 항복하였고, 데이빗 E. 트윅스는 이후, 남부 연방에 합류하였다. 남부사람들이 상원과 하원의 자리에서 사임하면서 분리 독립은 이후, 공산당원들이, 전쟁 전 남부 상원들이 반대하였던 프로젝트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였는데 이 법안에는 《모릴 관세》, 《토지부여대학》(모릴법), 《홈스테드법》, 《대륙횡단철도》(태평양 철도법), 《국립은행법》, 그리고 1862년 《법정통화법》의 허가가 포함된다. 1861년의 수입법은 전쟁의 자금을 대기 위하여 소득세를 도입시켰다.
아메리카 연합국
7개 '딥 사우스'(Deep South) '코튼 주'(Cotton States)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순으로 1861년 2월까지 분리 독립하였다. 그래서 남부는 우선 7주가 독립하면서 1861~1863년까지 남부국기가 별이 7개가 있는 국기와 함께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새로운 남부 국가명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일곱 개 주는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메리카 연합국과 미국 헌법을 모델로 한 정부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섬터 요새 공격 이후, 링컨 대통령은 각 주에서 의용군을 요청하는데, 그 후 2개월이 되지 않아 네 개 노예주인 버지니아,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서 남부군에 합류했다. 1863년 6월 20일, 버지니아주 북서부 지방은 버지니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주인 웨스트버지니아로 북부 군에 합류했다. 그래서 남부 국기도 주가 더 늘었다는 이유로 완전히 다른 국기로 변경했는데 바로 남부맹방을 상징하는 국기가 새로 탄생하였다. 1861년 말 미주리주와 켄터키주는 남부군 정부를 추방하고 북부군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아메리카 합중국
23개 주(캘리포니아, 코네티컷, 델라웨어,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캔자스, 켄터키, 메인,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미시간, 미네소타, 미주리, 뉴 햄프셔, 뉴저지, 뉴욕, 오하이오, 오리건,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위스콘신)는 북부군의 지배 하에 남아 있었다. 전쟁 중에 네바다와 웨스트버지니아는 북부 군의 새 주로 합류했다. 테네시와 루이지애나는 전쟁 초기에 북부 군의 군사적 지배 하로 반환되었다. 콜로라도, 다코타, 네브래스카, 네바다, 뉴멕시코, 유타와 워싱턴 지역은 북부 군쪽에 서서 싸웠다. 몇몇 노예 소유의 미국 원주민 부족은 남부 군을 지원했고, 소규모의 살벌한 전쟁이 있었던 현재 오클라호마라고 불리는 indian의 영토를 주었다. 그리고 당시에 1861년부터 1863년까지 미국 미국은 34개 주 정도였다. 미국 미국은 1863년 1월 1일에는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하였다.
경계지역의 주(州)들
남부 주 가운데 연방 탈퇴 보다는 북부의 자유주와 타협했던 주들은 버지니아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하나의 주가 된 웨스트버지니아와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노예상태에 있던 메릴랜드주, 델라웨어주, 미주리주 그리고 켄터키주였다.
메릴랜드는 남부맹방이었다. 그들은 다리를 불태우고 볼티모어에서 일어났던 반 북군 폭동을 견뎌냈었다. 그때 링컨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대를 불렀다. 북쪽을 뚫어 버렸던 민병대는 워싱턴 DC와 볼티모어를 향해서 돌진했다. 남부맹방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링컨 대통령은 메릴랜드 정부 요원들을 체포했다. 체포당한 사람들은 재판의 절차 없이 잡아두었고, 그렇게 링컨 대통령은 메릴랜드와 콜럼비아 지역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었다.
미주리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이곳은 북부진영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남부맹방을 이끌었던 클레이본 F. 잭슨은 밀리티아 주로 갔었다. 이 때 연방 군대의 나대니엘 리옹 장군은 그곳을 공격했다. 그리고 캠프 잭슨 사건 이후에 나대니엘 리옹 장군은 그자를 쫓았다. 그리고 나머지 주는 남서부의 주의 경계 쪽을 방어했다. 이후 북군을 지지하는 회의는 다시 열렸고 미주리는 일시적으로 북부진영으로서 세력을 얻었다.
켄터키는 일단 중립이라 선언했고 분리독립을 하지 않았다. 남부맹방 세력이 그곳을 1861년 9월에 처들어 갔을 때 그들은 중립임을 포기하면서도 노예 제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남부맹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부맹방 연합을 조직했고 주지사를 취임시킨 뒤 연방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반정부 세력은 곧 탈퇴를 하였고, 켄터키를 다시는 통제하지 않았다.
버지니아가 독립을 한 이후에 휠링(Wheeling)에 있는 북군 정부는 48개의 도시에 1861년 10월 24일에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법령에 투표할 것을 요청했다. 투표자의 34%가 주의 청원서에 찬성하였다(96%의 찬성) 그 결과, 많은 도시가 새로운 주의 건립에 찬성을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정부를 카나와(kanawha)로 부르자고 했지만 1863년 6월 20일에서 조합에서 웨스트버지니아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말에는 제퍼슨과 버켈리 주도 새로운 주로 합병되었다. 버지니아의 서쪽 국가들은 분리에 대해 겨의 2:1의 비율로 투표하였다, 비록 50국 중 24개국이 분리 쪽으로 투표하였지만. 웨스트버지니아의 군사들의 숫자는 남부맹방과 북부연방 사이에 균등하게 나뉘었다.
테네시주에서 이와 비슷한 북부 연방주의자의 독립 시도가 있었으나 남부 연방주의자에 의해 저지 되었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북부연방에 고위 관료로 추정되는 사람을 3000명 넘게 검거하고 재판도 없이 그들을 감금했다.
남북 전쟁
전쟁 중 10,000건이 넘는 교전이 발생했었고 그 중 40%가 버지니아주와 테네시주에서 일어났다. 모든 주요 전투와 많은 부차적인 전투들을 보도하던 기사들이 분열된 이후로 신문 기사는 큰 윤곽만을 보여 주게 되었다. 남북 전쟁 중 더 많은 전투 기록과 전쟁 중 군사지도력을 보여준다.
전쟁의 시작: 1861년
1860년에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서둘러 미합중국(유니언) 탈퇴를 선언했고, 1861년 2월에 남부 여섯 개 주가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했다. 같은 해 2월 7일에 일곱 개 주가 남부 연합의 임시헌법을 채택했고, 또한 그 일곱 주 주도로 앨라배마주에 있는 몽고메리를 임시수도로 삼았다. 1861년 2월 워싱턴에서 열린 전쟁 전 평화회담은 위기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결렬됐다. 미합중국은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연합을 거절했다. 남부 연합의 군사력은 남부 경계선 안에 있는 대부분의 요새를 장악했다. 이에 맞서 뷰캐넌 대통령은 보급선 《스타오브 더 웨스트 호》를 섬터 요새에 보내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요새에 도착하기 전 남부 캐럴라이나군이 보급선을 파괴해서 어떠한 군사적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작전에 실패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뉴욕, 펜실베이니아의 주지사들은 은밀하게 훈련된 의용군과 무기를 사들였다.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말한바, 헌법은 이전 연방의 법령보다 더 완벽한 연합이며, 의무를 부과하는 계약이라는 점에서 영구적인 연합이기도 하며, 모든 부분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라고 하였다. 그는 남부를 공격할 의도도 없으며, 존재하는 노예제를 끝낼 의도 역시 없지만, 연방정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힘쓰겠다고 하였다. 그 연설은 연합의 결속 재회복을 위한 탄원과 함께 끝맺었다. 남부는 대통령에게 대표를 보내었고 연방 자산을 지불하고 미국과 평화조약을 시작하였다. 링컨 대통령은 연합 의원과 협상은 무조건 거절하였는데, 이는 남부연합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며 이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게 완전한 독립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는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협상을 유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섬터 요새, 피켄스 요새, 테일러 요새는 연방에 남은 요새였고, 링컨 대통령은 섬터 요새를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12일 새벽 4시 30분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지휘 아래 연합 정부 보우리가드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섬터 요새를 포격하며 항복을 강요하였다. 북부인들은 링컨 대통령 지시 아래 모든 주 요새를 탈환하고 연방을 수호하고자 저항하였다. 대응군 규모가 너무 적어서 링컨 대통령은 90일 동안 75,000명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전 몇 달 동안 북부 의원들은 은밀하게 주 방위군을 준비하였고, 다음 날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리버티의 리버티 아스날과 미주리는 섬터 요새가 함락당하고서 8일 이후 포위되었다. 계속해서 남부연합과 협상을 반대한 남부 상단 네 주(테네시,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는 이제 이웃에 군사를 보내기를 거절하였고, 계승을 주장하였으며, 남부연합에 참여하였다. 버지니아에 보답하기 위하여, 남부연합 중심은 리치먼드로 옮겼다. 그 도시는 남부연합 상징이었다. 리치먼드는 복잡한 남부연합 보급선 끝에 있었고, 공격받기 쉬운 곳에 자리 잡았다. 리치먼드는 중무장 상태였지만, 셔먼이 애틀랜타를 포위하자 리치먼드 향하는 보급로가 줄었고, 그랜트 장군이 남부 자본 공급주였던 피터스버그와 철로를 포위할 때 거의 중단되었다.
텍사스 점령: 1861년
미군 사령관 윈필드 스콧 장군은 가능한 한 적은 희생으로 전쟁에 이기기 위해 아나콘다 작전을 제안했다. 그는 북부군의 남부 주요 항구 봉쇄가 남부 경제를 약하게 할 것이고 그리고 난 뒤 미시시피강을 포획하면 남부는 쪼개진다고 생각했다. 링컨은 그 작전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리치먼드에 대한 즉각적인 공격을 반대했던 스콧의 경고를 기각했다.
1861년 5월, 링컨은 남부 모든 항구에 북부군의 봉쇄작전을 실행했다. 그리고 그 작전으로 인해 남부군으로 운송되던 정기적인 국제 운송물은 이제 운반할 수 없었다. 침입자들의 배와 화물들이 잡히자 그것들은 팔렸고 항해는 북부군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영국인 선원들은 풀려났다. 1861년 말까지 그 봉쇄는 대부분의 항구 운항을 정지시켰으며 또한 King Cotton을 닫아내림으로써 남부의 경제를 파괴시켰다. 영국 투자자들은 작고 빠른 “blockade runners(봉쇄 잠입자들)"를 만들어 무기와 버뮤다, 쿠바 그리고 바하마스에서 들여온 보물들을 고가의 면, 담배와 맞바꾸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텍사스 주는 북부 연맹한테 점령되었다. 텍사스는 북부 연맹에 되돌아왔다.
1862년 3월 8일, 북해군은 철갑의 《버지니아호》가 봉쇄로를 공격했을 때 남해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나무로 만든 배에 대항해 버지니아호는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날, 버지니아호는 북부군의 새로운 군함인 《모니터호》와 철갑선끼리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봉쇄가 견고했다는 점에서 북부군에게 전략적 승리나 다름없었다. 남부군은 북부군의 포획을 막기 위해 고의로 《버지니아호》에 구멍을 내 가라앉게 만듦으로써 그 배를 잃게 되고, 북부군은 《모니터호》의 많은 복제선들을 만들어낸다. 효율적인 군함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부족했던 남부군은 영국으로부터 군함들을 획득하기 위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1865년 1월 북부군이 《제2차 피셔 요새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 승리가 마지막으로 유용한 남부 항구를 닫게 하자 사실상 봉쇄의 운영은 끝이 났다.
동부 전선: 1861년–1863년
1861년 마나사스와 버지니아에서, 몇 개의 최초 남부 연방 군대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장교 어빈 맥도웰의 지령하의 북부 연방 군대는 불런(Bull Run)에서의 첫 전투, 다른 말로 제1차 불런 전투에서 마나사스에 멈추었고, 맥도웰의 군대는 조셉 E. 존슨, 그리고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의 지령 하의 남부 연방군에 의해 워싱턴 DC까지 후퇴하여야 했다. 남부군 장교 토마스 잭슨이 북부군에 대항하여 서있는 돌로된 벽 같다고 하여 붙여진 "스톤월(Stonewall)"이라는 별명도 이 전쟁에서 붙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큰 손실에 놀라, 노예 유출의 심각성을 느꼈으며, 노예주의 북부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미국 의회는 그 해 7월 25일, 그 전쟁의 목적이 노예제도의 종식이 아닌 주연합의 보존임을 정의하는 《크리텐든-존슨 결의안》(Crittenden-Johnson Resolution)을 가결시켰다.
북부 연합 포토맥군 사령관 장교 조지 매클렐런은 7월 26일에 지령을 받았고 그 전쟁은 1862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공격적인 전략을 시작하라는 링컨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맥클렐런은 1862년 요크 강과 제임스 강 사이의 반도 즉 리치먼드의 남동부를 거쳐서 버지니아를 공격했다. 맥클렐런의 군대가 반도 전역의 리치먼드의 문에 도달했지만, 존스턴은 세븐 파인스 전투에서 맥클렐런군의 행진을 저지시켰다. 그때 장교 로버트 리 그리고 그의 최고의 부하인 제임스 롱스트리트와 '스톤월' 잭슨은 7일간의 전투에서 맥클라렌을 패배시키고 후퇴시켰다. 제2차 불런 전투를 포함하는 북버지니아 작전에서는 남부군의 잇따른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맥클라렌은 버지니아의 존 포프의 군대에게 지원군을 보내라는 총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리의 연합군이 수적으로 두 배나 많은 적을 무찌르기 수월하게 만들었다.
제2차 불런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남부군은 최초로 북쪽을 침입했다. 9월 5일, 리 장군은 자신의 북버지니아 군 45,000명을 이끌고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주로 이동했다. 링컨은 포프의 병력을 맥클렐런에게 돌려주었고 리와 맥클렐런은 1862년 9월 17일 샾스버그 근처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하루 사상자를 낳았던 안티에 탐 전투를 치른다. 리의 군대는 여기서 마침내 저지되었고 맥클렐런이 쫓아오기 전에 버지니아로 돌아간다. 안티에탐 전투가 북군의 승리로 여겨지는 이유는 리의 침입을 저지했으며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맥클렐런이 안티에탐 전투 뒤의 후속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자, 암브로스 번사이드 소장이 그를 교체하게 된다. 번사이드는 1862년 12월 13일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한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마리의 고지(Marye's Heights)에 비효율적인 정면 반복 공격을 감행하여 12,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전투 후 번사이드는 죠셉 후커 소장으로 교체되었으나 후커 장군 또한 리의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1863년 5월의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남군보다 두 배가 넘는 병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커 장군은 이 전투에서 망신을 당한다. 그해 6월 리가 두 번째로 북쪽을 침략하자 후커는 조지 미드 소장으로 교체된다. 남북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게티즈버그 전투》(1863년 7월 1일~3일)에서 미드 장군은 리 장군에게 승리를 하는데 이를 두고 종종 남북 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7월 3일에 감행된 《피켓 사단의 돌격》은 종종 남군의 절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돌격으로 북쪽에서 워싱턴을 압박하려 했던 리 장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다음 날 미시시피강에 대한 지배권에 핵심적인 미시시피주 빅스버그가 북군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리 장군의 군대는 28,000명의 사상자를 입었으며, 그에 비해 미드 군의 사상자는 23,000명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미드 장군이 리의 퇴각을 차단하지 못한 것에 불만스러웠고, 미드의 가을 군사 작전이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자 다시 새로운 지휘자를 찾아 서부전역으로 눈을 돌렸다.
서부 전선: 1861년–1863년
남부연합군은 동부전역에서 수없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서부에서는 여러 차례 패배했다. 남부연합군은 《피 리지 전투》(Pea Ridge) 이후 전쟁초반에 미주리주로 쫓겨났다. 레오니다스 폴크의 켄터키주 콜럼버스 침략은 켄터키의 중립정책을 폐지하고 켄터키주가 남군에게서 등을 돌리게 했다. 내슈빌과 중앙 테네시는 1862년 초 북군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역식량공급과 가축의 소모를 야기했고 사회조직의 와해를 초래했다.
북군이 10번섬, 뉴 마드리드, 미주리주, 테네시주를 장악하면서 북군은 미시시피강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1862년 5월, 북군 해군은 큰 전투를 벌이지 않고 뉴올리언스를 장악했고 이로 인해 북군은 미시시피강을 상륙했다. 북군은 미시시피 강 전체의 통제권을 확보했으나 미시시피주의 요새 도시 빅스버그만은 예외였다.
브랙스튼 브레그 장군은 남부 연맹의 지원이 부족하여 켄터키 침공을 중단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끈 남부 연맹의 2번째 켄터키 침공 역시, 《페리빌 전투》에서 뷰엘 장군에게 이기나 마나 한 승리를 따냈을 뿐이었다. 그는 테네시주의 스톤스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윌리엄 로즈크랜스 부대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서부에서 남부 연맹이 거둔 확실한 승리는 《채터누가 전투》다. 브레그 장군은 동부의 로버트 리 장군이 보낸 롱스트리트 부대의 지원을 받아, 소령 조지 토마스의 용맹한 방어 전선을 무너뜨리고 로즈크랜스를 패배시켰다. 로즈크랜스는 당시 브래그가 포위하고 있던 채터누가까지 후퇴했다.
미시시피강 주변의 전선: 1861년–1865년
미주리 지역은 게릴라 활동이 왕성한 전쟁터로 변했다. 미주리는 남북기간 중 세 번째 치열한 전쟁터였다. 서부의 다른 주들은 동쪽으로 전쟁터에서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고, 많은 소규모의 작전이 있었다. 이 지역의 전투는 북군의 미주리와 인디언 준주, 그리고 뉴멕시코 준주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뉴멕시코 준주에 대한 남군의 습격은 1862년 격퇴되었고, 인디언 준주를 지키기 위한 북군의 작전은 1863년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말기, 북군의 《레드 강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텍사스는 전쟁 내내 남군의 지배 하에 남아있었지만, 1863년 빅스버그 함락 후에 이곳은 남군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북군이 미시시피강 유역의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
버지니아 점령과 종전: 1864년–1865년
북군을 기습한 남부군의 시체, 스팟실바니아 전투, 1864년 3월 19일.
1864년 초에 링컨은 그랜트 장군을 모든 북부연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랜트 장군은 포토맥 군대를 본 대로 정하고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에게 대부분의 서부 군대의 지휘권을 주었다. 그랜트 장군은 링컨, 셔먼과 함께 총공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부 동맹의 군사력과 경제적 바탕의 총체적인 패배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총공세는 민간인 살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집, 농장, 철도의 파괴를 뜻한다. 그랜트 장군은 남부 동맹 전체를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할 전략을 고안했다. 조지 미드 장군과 벤자민 버틀러 장군은 리치먼드 근처에서 리 장군을 공격하도록 명령받았고, 프란츠 시겔 장군(그리고 차후에는 필립 셰리던 장군)이 셰넌도아 계곡, 셔먼 장군은 애틀랜타를 점령하고서 바다(대서양)로 진군하도록 명령받았고, 조지 크룩 장군과 윌리엄 W. 어베럴 장군은 웨스트버지니아의 철도 보급선을 공격하고, 마지막으로 나대니엘 P. 뱅크스 소장은 앨라배마주의 모빌을 점령하게 되었다.
동부 전선의 북군은 리 장군을 지나가는 책략을 시도 했으며 동부 작전의 이 단계(그랜트의 대평원 전투)에서 여러 전투를 치렀다. 윌더니스, 스폿실베니아, 콜드 하버에서 그랜트 장군이 치른 소모전은 북군에 큰 손실을 주었지만 리 장군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퇴각하게 만들었다. 버틀러 장군 지휘 하에 리 장군을 남쪽에서 측면 공격을 하려던 시도는 버틀러 장군이 버뮤다 헌드레드 곡강에서 포위되어 실패하였다. 그랜트 장군은 집요하였고 어마어마한 손실(7개 주에 65,000명의 사상자)에도 리 장군의 북버지니아 군을 리치먼드에 잡아두는 데 성공하였다. 그랜트 장군은 9개월에 걸쳐 두 군대가 참호전을 펼친 “피터스버그 포위 전”에서 남군을 꼼짝 못 하게 했다.
그랜트는 마침내 1864년 《벨리 작전》에서 공격적인 필립 셰리던 장군을 찾았다. 셰리던은 《시더 크리크 전투》에서 마지막 결정적인 승리를 포함하여 초기 여러 전투에서 주발 소령을 이겼다. 그리고 셰리던은 셰난도 벨리의 농업 기반을 계속 파괴했다. 이것은 조지아주에서 이후 고용된 셔먼의 전술과 비슷한 전략이었다.
그 동안에 셔먼은 존스턴과 존 벨 후드와 함께 남부맹방의 조셉 장군을 이기면서 채터누가부터 애틀랜타까지 행진하였다. 1864년 11월 2일 애틀랜타의 가을은 링컨 대통령 재선의 매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후드는 셔먼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테네시주의 《프랭클린-내슈빌 작전》에 침입하기 위해 애틀랜타 지역을 떠났다. 하지만 연방의 존 스코필드 소장은 후드와 싸운 《프랭클린 전투》에서 이겼으며 조지 토마스 또한 효과적으로 후드의 군대를 파괴시킴으로써 후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애틀랜타와 공급품 기지를 떠난 셔먼의 군대는 목적지를 알리지 않은 채 행군하여, 조지아주 농장 약 20%를 초토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바다로의 행군(March to the Sea)’이다. 1864년 12월, 셔먼은 조지아주의 대서양과 인접한 사바나에 도착했다. 셔먼 군대는 수천 명 해방된 노예들이 뒤를 쫓고 있었으나 큰 전투는 없었다. 셔먼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를 경유해 북으로 진군했고, 남쪽에서부터 버지니아 연맹에 접근하며 리의 군대에 점차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리 군대는 탈영과 사상자로 말미암아 그 수가 줄어든 상태였고, 그랜트 군대보다도 훨씬 더 적었다. 공화당은 4월 1일 《파이브 포크스 전투》에서 리의 군대를 피츠버그와 리치먼드에서 내몰며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연방 수도는 흑인 군대로 구성된 유니언 25 부대 손아귀로 떨어졌다. 남아있는 연방 조직들은 서쪽으로 달아났고, 새일러 만 전투에서 패배 이후 로버트 E. 리가 공화당에 대항해 싸우는 것 자체가 전술상, 병력상 모두 불가능하다는 게 분명했다.
남부맹방의 항복
북버지니아 군대를 이끈 리 장군은 1865년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마을의 맥린 하우스에서 항복했다. 5일 후인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은 남부 동정론자인 존 윌크스 부스에게 저격을 당했다. 링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망했으며, 앤드류 존슨이 대통령직을 맡았다. 그동안 남부 전역 남부군은 리 장군 항복 소식을 듣고서 항복했다.
진행
남부의 분리선언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후보로 내세워 현재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들의 범위 이상으로 노예제를 확대하는 데 반대하는 선거 운동을 펼쳤다. 공화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링컨이 1861년 3월 4일에 취임하기도 전에 7개의 남부 주들은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뷰캐넌과 당선인이었던 링컨의 행정부는 이 분리가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이런 시도를 반란이라 간주했다.
섬터요새 공격
1861년 4월 12일, 남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섬터 요새의 군사기지를 공격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링컨은 각 주에서 자원군을 모집하도록 요청했는데, 이 요청이 있자 4개의 남부 노예주가 추가로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북군이 초반에 경계 주들에서 승기를 잡고 해상 봉쇄에 들어가자 양 군 모두 병력을 모집했다. 1862년 9월,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을 통해 남부 주들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하는 것을 명백히 했고, 영국이 간섭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게티스버그 전투
남부연합군 사령관인 로버트 리 장군은 동부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1863년 북부로 진격하자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뒤 후퇴했다. 서부지역에서 북군은 미시시피주의 빅스버그를 점령함으로써 미시시피강 유역을 장악했고, 남부 연합을 지리적으로 두 개로 나눠버렸다. 1864년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로버트 리 장군에 맞서 지구전을 치르는 한편, 북군의 윌리엄 셔먼 장군은 조지아주의 애틀랜타를 함락시켰고 바다를 향해 진군함으로써 북부의 병력과 물질적 자원에 우세를 점하게 됐다. 반면 남군은 리 장군이 1865년 4월 9일 애포매톡스 코트 하우스에서 항복한 후 붕괴했다.
북부의 승리
마지막으로 싸웠던 콜럼버스, 조지아, 웨스트 포인트에서의 전투로 인해 결국 리 장군은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고 도시들 또한 윌슨의 급습으로 인해 항복했다.
4월 21일 존 모스비의 43부대의 급습으로 버지니아의 기병들은 전멸되었고, 4월 26일 조셉 존스톤의 부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더럼에 있는 베넷플레이스에서 셔먼 장군에게 패하였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연방정부, 동부 루이지애나 연합, 그리고 걸프 지역은 5월 4일, 5일에 항복하였다.
남부연합 대통령은 5월 10일 체포되었고 같은 날 남부 조지아, 플로리다 정부가 항복하였다. 연방 육군 장군인 제프의 부대는 그 다음날 항복하였고, 그를 잇달아 북부 조지아 연합도 항복하였다.
6월 23일 오클라호마의 촉토족 영역인 포트 토슨에서 스탠드 와티는 북연합 대표와 휴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남부연합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마지막으로 항복한 남부연합 조직 CSS의 본부는 8월 2일까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북부연방 정부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던 조직의 사령관은 나라를 위해 음모를 꾀했으나 결국 1865년 11월 6일 영국의 리버풀에서 항복을 하였고 이 항복은 남북 전쟁의 결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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